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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2025년 상반기 회고 - 나는 누구일까

by Jeongph 2025. 8. 17.

글을 좋아하는 내가 '평생 간직할 블로그'가 있다면, 혹은 평생 글을 쓰고 싶은 공간이 있다면 그 공간은 무슨 글로 시작해서 무슨 글로 끝날까 하는 고민을 했었다. 계속 고민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에세이로 시작하고, 에세이로 끝날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블로그의 시작 역시 에세이다. 블로그에 무슨 대단한 글들을 담더라도 결국 시작은 '나'이니까. 

회고 글은 그 기간을 정리하고, 다시금 기억하는 좋은 글이란 생각을 한다. 그래서 예전에 사용하던 블로그에서도 회고글을 썼었다. 근데 역시 습관이 되지 않으면 거르게 되고, 거르게 되면 안 하게 된다. 그래도 다시 1년에 2번은 써보자는 게 지금의 다짐이다. 

 

2019년 회고 - 나도 한번 써보는 한 해 보내기

나도 한번 써보는 한 해(에 여태까지 못 적어 놓은 인생 한방에) 보내기…!# Intro ?!작년까진 회고라는 건 해본 적이 없다 (애초에 작년까지만 해도 글 자체가 뭔가 큰 파급력이 있다는 사실을 잘

bin-e.tistory.com


글을 정리하는 데는 많은 방법들이 있지만, 약간 톺아보는(?) 느낌으로, 시간순으로 적어 보면 재밌을 것 같아서 이 회고는 주요 키워드들이나 주제를 위주로 작성 하기보단 1월부터 6월까지 훑고 오려고 한다. 

1월 - 그래도 시작

해돋이
2025년 해돋이 in 매봉산

1월 1일에 정말 오랜만에(마지막으로 해돋이를 본게 언젠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해돋이를 보러 갔다. 전날 해돋이 명소를 좀 찾아봤었는데, 서울에 의외로 "서울 해맞이 명소 18선" 이라는 사이트를 운영중이어서 도움이 됐다. 내가 방문한 곳은 "구로구 - 매봉산(정상)" 인데, 별다른 이유보다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택시 타고 산 입구에 내려서 정상에 오르기까지 오래 안걸렸고, 정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해돋이를 볼 수 있었다. 

 

서울 해맞이 명소 18선

2025년 을사년(乙巳年) 첫 해돋이, 서울 해맞이 명소와 함께 하세요.

www.seoul.go.kr

작년부터 '창업'이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던 시기라, 뭔가 새로 시작하는 마음이 들고, 벅차오르는 느낌이 나고, 뭔가 다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해돋이를 보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별다른 일이 없으면 매년 뜨는 해를 보러올 것 같다. 예전에 부모님과 해돋이를 보면서 "어차피 어제 뜬 해랑 1월 1일에 뜨는 해는 같은데 무슨 해돋이를 보러가냐" 는 말을 했었는데, 사실 중요한 건 그 같은 해를 보면서 느낀 경험이나 감정, 그 "의미"라는걸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한 달이라는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을 이 몇 장의 사진과 몇 개의 단어와 문장에 담는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2025년은 "무난한, 그리고 조금은 벅차오르는 시작"이다. 


2월 - 방황하는 시간

영금정
마음이 어지러울 때 찾는 장소 중 하나인 속초 <영금정>

예전부터 '내 일을 하고싶다'라는 고민을 계속 하고 있던 나였다. 물론 시키는 일을 착실히 해내는 것도 좋지만, 뭔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치, 그리고 '내가 계획하고 설계한 무언가'를 책임지고 해보고 싶다는 열망은 마음 어딘가에서 줄어든적은 있어도 없어진 적은 없다. 여전히 난 '책임과 권한이 동시에 주어질 때'를 가장 좋아하고, 그때 가장 잘 해내는 것 같다. 

'나갈까' vs '버틸까'

프릳츠
카페 <프릳츠> 의 마스킹테이프를 선물 받았다. 의미는 "EVERYTHING GOOD"

J커브를 지나는 시기였을까? 내가 속해있던 회사가 점차 상황이 안 좋아지고, 상황이 안 좋으니, 구성원끼리의 유대도 안 좋아지고, 무엇보다 회사가 여력이 안 되니 '그냥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해보고 있는 것' 같은 회사의 정책이나 방향성. 그리고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는 리더들 사이에서 난 더 크게 방황했다. 그리고 방황할수록 마음에 있는 목소리들이 들리고 '나갈까' vs '버틸까'를 정말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 같고, 답은 이미 내 스스로 알고 있었다. 다만 무섭고 두려웠을 뿐. 


3월 - "그때가 바로 뛰어야 할 순간이야"

A Most Violent Year
영화 <A Most Violent Year(2014)> 의 대사

본적 없는 영화지만 영화 <A Most Violent Year>라는 영화에서 나온 대사를 좋아한다. 영화 전체를 본 적은 없어도, SNS에서 이 대사를 인용한 짧은 영상들을 접했고, 정말 멋진 대사라고 생각했다. 대사는

When it feels scary to jump, that is exactly when you jump. 
Otherwise you end up staying in the same place your whole life.

의역하면 "당신이 뛰기 두려울 때, 그때가 바로 뛰어야 할 순간이다. 아니면 평생 같은 자리에 머물게 된다"라는 뜻인데, 뭔가 내가 걱정하는 상황들과 직면하지 못하는 두려움들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며, 삶을 관통하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행동'에 대한 대사라는 생각이 든다. 

예비 백수

예비 백수

끝내 2월 중순쯤 회사에 퇴사를 요청했고, 3월까지 회사에 다니는 '예비 백수'가 되었다. "오 퇴사하면 뭐 하실 생각인데요?"라는 질문을 끝없이 받았지만 사실 정해진 건 없었다. 단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가 궁금했을 뿐. 내 멘토는 나에게 이런말을 했다. 

퇴사해 보라. 취업은 언제든 다시 하면 되니까. 
그리고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을 때, 비로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라고 하셨다. 그 말에 난 공감했고, 사실 '무엇이 되려고'가 아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보려고' 퇴사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랬던 예비 백수는 이 글을 쓰는 현재(2025/08/17)까지 아직도 '나를 찾는 여정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퇴사

많은 분들이 축하(?) 해주셨는데, 그것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살아가고 있다는걸 새삼(?) 느꼈다. 다들 잘됐으면 좋겠다. 


4월 - 건강이 전부다

판교
내가 다니는 병원이 있는 판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사실 퇴사를 고민한 이유 중에 '나를 알아가는 시간'도 있지만, 한편으론 '건강'의 이유도 컸다. 작년 말에 회사가 공유오피스를 이사하면서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아토피와 호흡기 질환들이 다시 심해지고 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이게 나아지지 않고 점차 악화돼서 병원에 방문했을 때 "아마도 환경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일단은 '건강'부터 되찾기로 했다. 

부귀리 벚꽃길
춘천 카페 <감자밭>, <부귀리 벚꽃길>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공기 마시고, 고향에도 다녀왔고, 모든 글에도 쉼표가 필요하듯 내 인생에도 적절한 휴식이었다고 생각한다. 


5월 - 몰랐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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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강남 창업허브센터 데모데이 참석

안 하던 짓(?)들을 하기 시작하고, 안 가봤던 곳들을 가보고, 안 해봤던 것들을 해봤다. 일단 창업이 뭔지 궁금해서 강남 취•창업 허브센터 등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노력했고, 처음 보는 것들이고 약간 부끄럽기도 했지만 '뭐 모를 수도 있지' 마인드로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해봤다. 세상은 내가 보던 것보다 더 넓고, 더 다양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속엔 엄청난 열정들이 있고, 자신의 꿈을 찾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강남취•창업허브센터

 

www.gangnam-jobnstartup.com

결국 잡부가 되어야 한다

새로 강의를 들으며 프론트와 웹 개발을 시작했다. 잘하는 건 백엔드랑 인프라(DevOps)뿐이고, '뭔가를 혼자 만들려면 이것저것 다 조금씩은 할 줄 알아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며 단순히 백엔드라는 좁고 한정된 스킬 말고,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개발'은 혼자서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는. 즉, 모든 걸 고도화하고 깊이감 있게 다루긴 힘들 수 있어도, 백엔드는 깊이 다룰 수 있으니, 혼자서 간단한 화면 개발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키우자. 라는 목표가 생겼다. 그리고 여전히 공부중이다. 


6월 - 나는 누구인가

화천
유난히 좋은 날을 왜 보지 못했을까.

6월 말. "우리 다섯은 한 손"이라며 완전체를 말하던 소중한 친구 중, 가장 서글서글하고 가장 느긋하던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엔 이것저것 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들떠있던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고 사실 한동안 아무것도 못 했다.

6월쯤부터 '나는 무엇인가', '난 뭘 할 수 있고, 무엇을 하고싶은가'에 대한 고민을 끝없이 하던 시기에 겹쳐 '인간은 뭘까, 인간은 왜 살까' 같은 좀 더 철학적인 고민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엔 영원히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빌어서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 

'개발'과 함께하는 '인생'이라는 여행 

엽서
나에게 여행이란

여전히 많이 고민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고민이 가능하다. 사실 내가 낸 정답은 '정답은 없다. 그리고 알 수 없다'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단어들을 만났다. 여전히 난 이 순간, 기억, 시간, 효율, 미래, 따듯한 세상, 개발, 도움, 봉사 .. 등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마주하는 시간이었고, 여전히 인생의 마지막에 '개발'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여전히 개발하기로 한 이유다. 그것이 즐거우니까. 

시간은 소중하다고 생각하니까, 모든 걸 기록 합니다. 

1년째 매일을 기록하는 Daily log

단, 단순히 '개발'이라는 단어보단 '스스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 그리고 세상을 만들고 창조하는 것 같은 그 느낌, 그리고 내 손에서 나온 결과물을 눈으로 보고있을 때의 느낌. 그 과정을 좀더 알아가며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완벽하게 할 수 있는것. 그것은 기록이다. 나는 항상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의 흐름과 지금의 '순간'을 난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변하지 않는다. 

마치며 

'불가능'은 그냥 내가 만들어낸 괴물이니까

자전거길1자전거길2
자전거 길

막차가 끊겨, 서울의 동쪽에서 서울의 서쪽까지 따릉이를 타고 3시간이 걸려 집에 오는 길에 난 '진짜 불가능한 건 없구나' 라고 생각했다. 문득 포기하기도 쉽고, 충분히 포기할 수도 있는 여정. 근데 '그냥 해볼까? 할만할 거 같은데' 라는 믿음이 멍청해 보이는(?) 시작에서 도착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별것 아닌 것 같은 경험에서 난 '가능성'을 봤다. 그리고 여전히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경험이 모든 것이다.

타이탄의 도구들
인생책 중 하나인, 팀페리스의 <타이탄의 도구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이하 AI) 시대를 관통하며, 내 퇴사와 우연히 겹쳐 2025년에는 ChatGPT로 핫한 상반기였다.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바이브 코딩"이니, "클로드 코드"로 개발자가 필요 없다느니 하는 소식들을 하루에도 수십 개씩 접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여전히 '개발'이었다. 그건 AI에게 맡겨서 단순히 '코드'를 뽑고 싶은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만드는 세상의 과정이며, 내가 만든 객체의 움직임이다. 퇴사의 한켠에 'AI의 도움으로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세상의 모든 것을 AI가 대체하더라도, 결국 '경험'은 빼앗아 가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AI는 도울 뿐, 운전대는 내가 잡아야 한다. 


이래저래 떠나는 인생이란 여정. 이제서야 목적지를 정할 수 있고, 정하고 있고, 눈에 보이는 느낌이 난다. 닻을 어떻게 펴냐, 노를 어떻게 저어서 가냐는 그 뒤의 문제일 뿐, 왜 내가 이것이 좋은지, 그리고 왜 하고싶은지, 그리고 난 무엇이고 여전히 무엇이 가능한지. 그것들을 겪는 중이다. 소중한 과정이다. 

'개발자'라는 내 페르소나와, '나'라는 페르소나를 잘 격리해서 각자 성장하고 싶지만, 결국 내가 개발자고, 개발자인 내가 하는 생각이라 완벽하게 다르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읽었던 책 중에, 완독하고 내 인생 책 목록에 추가된 "사이먼시넥"의 <스타트 위드 와이> 라는 책의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인용하며 마무리해 본다.

화살이 목표물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반대 방향, 즉 180도 뒤로 당겨져야 한다. WHY도 마찬가지다. WHY는 앞으로 성취하고 싶은 목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짜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중략)
오히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반대 방향을 바라볼 때 비로소 드러난다.
WHY는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다. 

- 사이먼시넥 <스타트 위드 와이>

이 순간에도 난 숨 쉬고 있다. 처음부터 잘하지 못해도 여전히 난 시작할 것이고, 난 6살의 자전거를 기억하고, 20살의 풋풋함을 잊을 수 없다. 그 경험들이 쌓여 나를 만들고, 과정들이 쌓여 나를 성장시킬 것임을 안다.

나는 여전히 그 과정을 즐기고 기록하며, 나를 키워야겠다.